🤐한 가지 고해로 시작하자면...
저와 DJ 초마가 힘을 합쳐 만들어낸 이 방구석 DJ 레터메일이 어느새 회차로는 19회, 개수로는 20개의 레터메일에 도달했습니다. 한 주에 1개의 메일을 보내니 벌써 20주, 즉 4~5달이 지났습니다. 저는 굉장히 빨리 끓고 또 빨리 식는 사람이라 시작한지 반 년이 다 되어가다보니 처음 이 레터메일을 기획할 때의 설레임이 조금은 희미해진 것도 같습니다. 가끔 바쁜 한 주를 보내고 일요일이 되면, 왜 내가 이런 사서 고생을 한다고 했을까...?라고 과거를 후회하기도 합니다😳
처음에는 영화에 대한 이야기가 하고 싶어서 무작정 시작했지만, 스포일러가 될 수 있다는 걱정에 줄거리를 선뜻 읊기도 그렇고, 그렇다고 잘 알지도 못하는데 비평 같은 걸 쓰기도 그렇고,, 결국 칸을 채우는 건 저의 개인적인 이야기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처음의 방향을 잃었다는 생각도 들고 글을 쓰는 게 빠른 편도 아니어서 그런지 잠깐 휴재?의 유혹도 있었는데요, 그래도 꾸준히 DJ 초마와 구독자 여러분의 여러 피드백들이 저를 붙잡고 끌어줘서 어찌저찌 이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아무튼 이번 주제가 주제이니만큼, 이렇게 한 가지의 고해로 서문을 열었는데요, 별다른 말은 아니고,,, 아무튼 감사합니다!!(?)
저는 소띠라서 그런지 되새김질을 잘하는 편(?)입니다. 행복했던 기억이든 괴로웠던 기억이든 한 번 머리에 떠오르면 그걸 끝까지 리플레이하고 그 때 그 감정에 다시 사로잡히곤 하는 거죠. 가끔 흑역사라 부르는 몇몇 기억들이 머리를 스쳐지나가면 이불이 없어도 이불을 팡팡 차고 싶어지는 그런 기분이 들곤 합니다. 무언가를 생각하는 것과 무언가를 느끼는 것은 왠지 모르게 서로 정반대에 위치해 있을 것만 같은데요, 하지만 저는 감정이라는 것은 항상 생각이라는 과정을 거쳐 도달하는 무언가라고 생각합니다. 무언가를 경험했을 때 순간 직관적으로 느끼는 감정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되짚어 생각하지 않으면 사실 경험했다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찰나에 지나가 사라져버린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무언가를 확실하게 느꼈다고 말할 수 있으려면, 그 순간 생각이라는 프로그래밍을 이미 거친 것이 되겠죠.
앞에서 고백했던 것처럼, 저는 자주 미루고 회피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최대한 될 때까지 미루고 미루다가 급하게 해버리는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물론 어찌저찌 해결해 버리고 나면 '하면 된 거 아닌가'라고 안일하게 생각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미루는 제가 그동안 편안하고 행복하냐?고 묻는다면 그건 절대 아닙니다. 미루는 내내 그것에 대해 생각하고 괴로워하죠. 심지어 예정대로 끝내버릴 일이었다면 그만큼 괴로워할 틈이 없었을 겁니다. 알면서도 뜻대로 되지 않는 나 자신을 가끔 미워하며 고민하다가 내린 결론은, '생각이 너무 많다'는 것이었습니다. 무언가를 미루거나 회피하려고 하는 것은 그것에 대해 생각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건만, 오히려 역설적으로 그것에 대해 너무 많이 생각했기 때문에 그런 결론이 나는 것 같습니다. 과도한 생각, 혹은 걱정이 그 일을 두껍게 감싸버려서 오히려 더 크게 느껴지는 거죠.
그래서 이 생각 > 감정이라는 프로그래밍 과정을 자주 역이용하려고 합니다. 저는 유독 힘든 외출을 한 날이면 집에 들어오자마자 바로 화장실로 직행을 하는데요, '씻기 싫다'는 생각을 반복하기 전에 일을 끝내버리는 거죠! 일단 집에 들어오기 전과 후의 마음가짐이 다르기 때문에 아직 조금의 의욕이 있을 때 생각을 하지 않고 바로 실행에 옮기고 나면, 씻는 것이 싫다는 생각을 하기도 전에 이미 끝나버린 일이 됩니다. 물론 세상에는 씻는 것처럼 간단하고 빠르게 해결되는 일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조금 더 신중하게 고민에 고민을 기해야 할 문제들이 쌓여있고, 그런 일들은 이런 생각을 차단한다고 해서 곧바로 진행할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과도한 생각들이 일을 해결하려는 의지마저 깎아버리기 전에 시작하는 것이 좋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말을 하고 있는 저도 밀린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닌데요, 마침 이렇게 이야기가 나온 김에 하나씩 해보자구요!
-
🐳아무도 탓할 수 없는
"Call me Ishmael." 책의 첫문장이 우리나라에서는 "나를 이스마엘이라 부르라."로 번역되어 굉장히 강렬한 인상을 주는 책 <모비딕>은 '모비딕'이라는 거대한 고래가 등장하는 소설입니다. '이스마엘'이라 불리는 화자는 소설 내내 주로 자신이 타고 있는 배의 선장 '에이허브'와 고래 '모비딕'의 갈등을 관찰하고 있습니다. '에이허브'는 과거 '모비딕'에게 당한 이후로 줄곧 그 고래를 향한 복수심과 증오심으로 살아가는 사람인데요, 모비딕은 어떤 거대한 자연의 일부로 선장을 향한 그 어떤 감정도 사실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결국 에이허브 선장을 죽음 - 파멸로 이끄는 것은 그 고래 자체라기보다는 에이허브 선장이 고래에게 투영했던 그 감정들, 일종의 트라우마, 자신의 상처와 실패를 회피하려 한 결과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사실 이야기의 화자 이스마엘 또한 성경에서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에서 이름을 따온 것이며, 배에 타게 된 이유도 크게 보면 일종의 회피?로 볼 수 있을 것 같군요.)
그리고 이 <모비딕>이 큰 줄기를 차지하고 있는 영화가 있습니다. 작년에 개봉했던 <더 웨일(The Whale)>인데요, 동생과 보러 가서 서로 펑펑 울다가 머쓱하게 극장을 나왔던 기억이 있습니다. 사실 저는 이 영화를 그리 좋아하는 편은 아닌데요, 이번 주제를 생각하면서 가장 먼저 떠오른 영화였기에 조금 놀라기도 했습니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등장인물은 모두 회피로 인해 삶의 방향이 바뀐 사람들입니다. 주인공 찰리는 결혼을 하고 딸을 낳았지만, 이윽고 한 남자와 사랑에 빠져 가족을 버렸지만 이내 그 남자는 우울증으로 인해 자살하고 찰리는 그 후유증으로 밖에 나가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런 찰리의 건강을 돌보는 보호사 리즈는 그 남자의 동생이기도 하며 강압적인 집안에서 자신의 오빠를 지키지 못했다는 생각에 괴로워합니다. 그런 찰리를 우연히 만나게 된 전도사 토마스는 알고보니 교회에서 무언가를 훔쳐 도망친 상황이었고, 찰리의 딸 앨리는 자신을 버렸던 찰리를 끝내 진심으로 마주하는 데에 실패합니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 <모비딕>은 찰리와 앨리를 관통하는 중요한 소재인데요, 이건 아마도 영화를 통해 확인하시면 좋을 것 같네요! 아무튼. 이 영화는 이러한 회피로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등장하며 이야기는 절대 긍정적인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습니다. 특히 주인공 찰리의 상황에 깊게 공감하거나 이입하기엔 조금 힘이 들기도 합니다. 어찌됐건, 가족을 버린 찰리로 인해 남은 가족들이 지금도 고통에 빠져 있기 때문이죠. 하지만 그럼에도 온전히 그 인물들을 탓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 모든 것은 인물들의 회피에 따른 결과이며 개인의 선택이라 볼 수도 있겠지만, 과연 그 선택에 본인 외에 그 어떤 것도 개입하지 않았을까요? 개인이 그런 결과를 낳을 수 밖에 없었던 데에는 정말 외부의 책임은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요? 회피하는 인물들을 스크린 너머 우리가 직면하게끔 하는 것, 그 묘한 교류에서 어떤 복잡한 불편함들이 생겨납니다. 아무도 탓할 수 없을 것만 같은 그런 결과들 사이에서요.
당사자, 본인이 아니면 복잡한 사정을 알기 어렵고, 그렇기에 우리는 때때로 쉽게 말을 얹곤 합니다. 특히 자신의 일이 아니면 보다 더 쉽게 느껴지기도 하고 말이죠. 그렇기에 우리는 종종 어떤 두려움에 의해 회피를 택하고, 그 결과에 괴로워하는 사람들에게 자신도 모르게 뾰족한 반응을 보이기도 합니다. 두려움에 주저하고, 또 그로 인해 괴로워하는 사람들을 조금 더 품어줄 수 있는 세상을 바라며 이번 레터메일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
🎵오늘의 노래: Cindi Water - life is so hard
축축한 물속에 있는 것 같으면서도 서늘한 느낌보다 아늑한 느낌을 주는 것 같은 노래입니다! 가사가 없으니 조용한 밤에 틀기 좋을 것 같아요!
TIP) 앨범 커버를 클릭하면 노래 감상이 가능한 유투브 링크로 연결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