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 한 주 또 잘 보내셨나요? 벌써 이번 편지가 99번을 달고 출발합니다. 0호였던 첫 편지를 포함하면 사실 이번 편지가 100번째 편지인 셈인데요. 실감이 안 나는 숫자가 코앞에 다가오자 새삼 시간이 정말 빠르다는 생각이 듭니다.
차근차근 저의 지난 발자국들을 돌아보다보니 어느 편지에서는 참 할 말이 많았구나, 오 이런 생각도 했었구나, 혹은 이때는 좀 바빴나보다(?) 등 여러 재밌는 감상들이 피어오릅니다. 다음주 100번을 달게 될 편지에서 이에 대해서 조금 더 자세히 얘기해보고 싶군요..
아무튼 지난 편지들 가운데서도 바로 직전 편지에서 저는 '그럼에도 영화관으로' 간다고 말씀을 드린 바 있습니다. 극장 개봉 영화 중 보고 싶은 영화가 산처럼 쌓여 있는데 막상 시간은 잘 나지 않아서 조금 조급한 것도 사실! 그 김에 극장에 걸려있는 따끈따끈한 영화 한 편을 보고 왔는데요. 여러분도 꼭 이 영화를 보셨으면 하는 마음에 부랴부랴 들고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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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를 무서워하는 마음: <세계의 주인> (스포, 트리거 주의)
저는 사실 시네필이라고 하기에는 좀 깊이가 없고, 그렇게 영화를 많이 보지는 않습니다만,,, 그럼에도 꼭 챙겨보는 감독 몇 명은 있습니다. 오늘 소개해드릴 이 영화를 만든 윤가은 감독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우리집>이 엊그제 같은데 그게 벌써 6년 전 영화더라고요! 그 이후 오랜만에 윤가은 감독님의 장편 신작이 나왔다는 소문에 얼른 극장으로 달려갔습니다.
시끌벅적한 고등학교의 교실, 그 소란 한가운데에는 항상 '주인'이가 있습니다. 그런데 학교를 벗어나면 도장에서 또 열심히 태권도를 배우고, 바쁜 엄마가 일을 하시는 사이에 동생과 함께 집안일도 해내고, 봉사활동도 적극적으로 다니는 등 이렇게 24시간의 하루를 알차게 사는 고등학생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쉴 새 없이 돌아다니는 주인이를 보면 에너지가 넘쳤던 제 고등학교 시절이 문득 떠오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밝게 그려지는 일상에서 우리는 계속 마음에 걸리는 조각들을 발견하곤 합니다. 영화가 진행되면서, 이 조각들은 점점 날카로워지고 거대해져서 마음 깊이 박히곤 합니다.
주인에게는 가끔 울컥울컥 넘어오는 분노가 있습니다. 사과를 보고 마치 극심한 알러지처럼 거부 반응을 보이는 것은, 그 붉은색 열매의 탓이라기보다는 그 열매를 '사과'라고 부르는 데 이유가 있습니다. 주인이가 나가는 봉사활동 단체는 굉장히 폐쇄적입니다. 주인이가 자신의 남자친구를 데려왔을 때, 단체의 일원이자 주인이가 매우 믿고 따르는 언니 '미도'는 엄청나게 화를 냅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이야기가 차차 진행되면서 밝혀지죠. 영화가 처음부터 많은 것을 드러내지 않고 점차 조금씩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저도 영화 스토리를 말하면서 조심스러워지는데요. 이 뒤에 이어질 제 편지를 계속 읽을 것인가 여부는 여러분의 선택에 맡겨두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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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단체는 과거 친족 성폭행 피해자들이 모여 만든 것으로, 주인은 이 단체를 통해 봉사활동을 한 지 꽤 되었습니다. 어느 날, 아주 어린 동생 누리를 데리고 귀가하던 수호는 성범죄자가 출소 후 다시 자신들이 살고 있는 동네로 돌아온다는 뉴스를 접하게 됩니다. 이에 학교에서 반대 서명을 받기로 결심하는데요, 전교생 가운데 오직 주인이만이 서명에 동참하지 않습니다. 바로 그 성명 중에 동의하지 않는 문구가 있었기 때문이죠. '가해자가 남긴 씻을 수 없는 상처'에 동의하지 않는 주인은 끝까지 동의서명을 하지 않고, 그로 인해 같은 반 친구인 수호와 갈등을 겪게 됩니다. 처음에는 그냥 4차원스러운 주인의 생뚱맞은 고집이라고 생각했던 수호는 이내 주인이 과거 피해를 겪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이윽고 학교에 이 사실이 널리 퍼지게 됩니다. 주인의 세계는 이 날을 기점으로 조금씩 달라집니다. 친했던 친구들과도 알 수 없는 벽이 생긴 느낌이고, 불명의 발신자로부터 계속해서 쪽지도 받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쯤 영화의 제목을 다시 돌이켜봐야 합니다. '세계의 주인', 주인이의 세계의 주인은 주인입니다. 주인은 자신의 세계를 다시 열심히 가꿔나가기 시작합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보면서 정말 많이 울었는데요. 사실 왜 울었는지 지금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절대 주인이가 불쌍해서라든지, 아니면 보이는 현실이 너무 잔인하다든지 그런 이유가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제가 그때 울었던 그 순간에 대해서는 극장에서 함께 영화를 감상한 사람들만이 공감할 수 있는 그런 무언가일 것입니다.
윤가은 감독은 이번 영화와 관련된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영화가 좋았든 싫었든, 영화관에 들어갈 때와 나올 때의 마음은 달라져 있다. 2시간 동안 집중적인 대리 경험을 하고 나면 삶을 대하는 태도에 미약한 변화라도 생긴다. 아직 삶에서 이를 뛰어넘는 강렬한 체험은 해보지 못했다. 영화관에서 보는 영화는 언제나 유효하다"
오랜만에 이 말을 정말 실감했습니다. 제 세계의 주인은 저이면서도, 극장에서 나온 저의 세계는 이 영화로 인해 조금 달라졌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이 영화가 가장 원하는 지향점이지 않을까 짐작해봅니다. 세차장에서 주인이가 엄마인 태선과 함께 대화를 하던 장면, 주인이의 동생인 해인이 끙끙거리며 편지의 답장을 고민하던 장면, 해인의 학예회에서 걱정들을 담은 쪽지가 엎어지는 장면, 미도가 주방에서 표정을 고치는 장면 등 몇몇 장면들이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이 납니다.
2014년, 이처럼 성범죄 피해자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한공주>라는 영화가 개봉했습니다. 당시에 저는 굉장히 큰 충격을 받았고, 제가 받은 충격을 잘 알지도 못한 채 좋은 영화라고 평가를 내리곤 했습니다. 시간이 지나 조금 더 자란 저에게 이 영화는 그때만큼 좋은 평가를 받지는 못할 것입니다. 생각보다 영화에는 많은 것들이 담깁니다. 창작자의 시선과 온도, 그리고 세심함 등은 관객들에게도 분명히 전해집니다. 조심스럽게, 그럼에도 분명하게 자신이 하고자 하는 말을 담은 윤가은 감독의 이 영화는 그렇기에 더욱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 모든 인물들에게 강한 애정을 느끼게 되었지만, 그 중에서도 주인의 동생 '해인'에게는 무한한 애정을 표하고 싶습니다. 깜찍한 내복을 입고 열심히 가족들 앞에서 마술쇼를 보이는 천진난만함 그 뒤로 어른들은 알지 못할 단단함을 가지고 있는 해인, 그리고 그 해인을 훌륭하게 연기한 이재희 배우를 오래 기억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당연히, 주인을 연기한 서수빈 배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끊임 없이 독립영화를 찾고 갈구하는 이유는, 이제껏 만나지 못한 이 배우가 어떤 톡톡 튀는 연기를 할 지 한없이 기대하기 때문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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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노래: Bach - Sheep may safely graze
이 영화에서 계속해서 등장하는 OST 중 하나입니다. 잔잔한 피아노 곡이 왠지 모를 희망찬 느낌을 주는데요. 특히 이른 아침에 듣기 좋은 이 음악을 들려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