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은 비 오는 날을 좋아하시나요? 이 질문을 하면 제 주변 사람들은 대부분 "실내에서 보는 비는 좋아한다"고 대답하곤 합니다. 저도 공감해요. 긴 장마의 한가운데에 있을 때는 더더욱, 쏟아지는 비를 직접 맞는 것 보다는 멀리서 그걸 관조하는 것이 마음의 평화를 가져다준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의 저는 비 오는 날을 좋아하는 편인데요.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7살 때쯤인가, 가족들과 높은 산에 올라갔다가 폭우를 만나서 그대로 고립될뻔 했던 적이 있거든요. 그 후로 길을 걷다 갑자기 비가 쏟아지면 종종 두려움에 떨곤 했습니다. 그러다가 어떤 일을 계기로 더 이상 비를 무서워하지 않게 됐는데요. 때는 바야흐로 중학교 2학년! 저는 학교에서 친구들과 한옥마을로 1박 2일 캠프를 떠났습니다. 여러 명이서 수다를 떨고 베개싸움을 하다가 밤을 샜는데, 도중에 밖에서 비 내리는 소리가 들렸어요. 곧장 문을 열고 나가보니 아니나 다를까 처마에서 비가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주변이 엄청 조용한 한밤중이었는데, 마루에 앉아 친구와 한참동안 그 풍경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던 순간이 아직도 기억이 납니다. 쏴아아-하고 쏟아지는 소리가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더라고요.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순간이어서 그럴까요? 어떤 기억들은 시간이 오래 지났어도 뚜렷한데 제게는 그날이 그렇습니다. 덕분에 비를 덜 무서워하게 되기도 했고 말이죠!
☔불행을 팔고 행복을 사는 곳, 장마 상점
장마를 주제로 정하고 나서 '비'를 메인으로 다룬 소설이 여럿 떠올랐습니다. 그중에서도 직접적으로 '장마'를 재미난 소설적 장치로 녹여낸 책이 있어 소개해드리려고 해요. 유영광 작가의 소설 <비가 오면 열리는 상점>입니다.
<비가 오면 열리는 상점>은 <달러구트 꿈 백화점>과 비슷한 힐링 판타지 소설이에요. 판타지 장르지만 또 너무 판타지스럽지는 않은 느낌이랄까. 책에 등장하는 위로가 너무 직접적이거나, 다소 유치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우리들의 마음을 건드리는 부분이 있음은 분명합니다. 책을 일기는 해야 하는데 무거운 주제는 싫으신 분들에게 추천드려요! 아주 쉽게 쓰인 책이라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전혀 없고, 말하고자 하는 바도 직접적이고 명확한 소설입니다.
소설의 도입은 이렇게 시작해요.
「 레인보우 타운의 어느 오래된 폐가.
언젠가부터 이곳에 관해 전해져 오는 괴이한 소문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사연을 이 낡고 허름한 폐가에 편지로 보내면, 어느 날 정체 모를 티켓 한 장이 집으로 도착한다는 것이었다. 뒷부분은 더 얼토당토않았다. 장마가 시작되는 날, 티켓을 가지고 폐가로 찾아가면 자신의 삶을 원하는 대로 바꿀 수 있다고 했다. 」
주인공 세린은, 삶에 염증을 느끼다가 위 내용을 듣고 자신의 사연을 편지로 써서 보냅니다. 그 대가로 '골든 티켓'을 얻어 자신의 삶을 원하는 대로 바꿀 수 있는 갖가지 구슬들을 갖게 됩니다. 구슬을 통해 세린은 '좋은 대학을 나온 삶', '돈이 아주 많은 삶', '개인 카페를 운영하는 삶',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는 삶' 등등 경험해보고 싶은 인생을 사는 자신의 모습을 체험해봅니다. 그리고 나서 자신에게 소중한 진정한 삶의 가치를 깨닫죠. 말하고 보니 영화 '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 와도 비슷하네요!
세린이 구슬을 통한 모험을 떠나기에 앞서, 소설은 독자에게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불행을 팔아서 (자신의 사연을 써서 편지를 보내는 행위) 행복을 얻는 (구슬을 통해 원하던 삶을 체험하는 기회) 일이 있다면 행하겠느냐고 말이죠. 또한 장마의 특성을 잘 살려서, '이번 장마는 며칠 동안 지속된다'는 언질을 미리 주기도 합니다. 장마가 지속되는 기간 동안만 구슬의 효력이 지속되거든요 😂
🌧️그림자가 일어서는 세상에 맞서는 방법
한 권만 소개하고 넘어가긴 아쉬워서 한 권 더 준비했습니다. 황정은 작가의 <백의 그림자>인데요. 이 책에는 비라든가 장마, 빗물이 고인 웅덩이를 묘사하는 문장이 자주 등장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책을 읽는 동안 가랑비에 젖듯 축축해지는 기분이다'라는 감상평을 남기는 분도 계시고요. 일례로 하기와 같은 부분입니다.
「 팔월엔 비가 내렸다. 거의 매일 내렸다. 퍼붓듯 쏟아지다가 반짝 갰다가 꾸물꾸물 어두워졌다가 툭툭 떨어지다가 다시 한차례 퍼붓고 점차 가늘어져서 그 비가 밤새 이어지는, 뒤끝 있는 날씨가 계속되었다. 」
'뒤끝 있는 날씨'라니! 요즘처럼 한 달 내내 비그림이 가득한 일기예보를 묘사하기에 참 적절한 단어가 아닌가 합니다. 책은 '은교'와 '무재', 두 인물을 중심으로 전개되는데요. 둘의 시선을 따라 철거를 앞둔 전자상가에서 일하는 인물들의 삶을 그리고 있습니다. 소설 내에서 '그림자'는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잔인한 현실, 압박감 등을 나타내는 존재로 그려집니다. 곧 무너질 삶의 터전 안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삶에 불쑥불쑥 고개를 들이미는 그림자들. 그 그림자들에 각자의 사연이 담겨 있습니다. 환상이나 환영으로 묘사되기에는 약자들이 겪는 일상의 폭력을 보다 실질적으로, 덤덤히 묘사하고 있어 무시하기가 어렵습니다. 경제적인 어려움이 등장하기도 하고, 어쩔 수 없이 삶에 동반되는 슬픔과 고통의 무게로 묘사되기도 하죠.
특히 책에는 그림자가 '일어난다'는 표현이 등장해 강한 인상을 남기는데요. 무언가 솟구치거나 일어나는 장면을 한 번 상상해볼까요?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다가 누군가 일어서면 주목 받게 되는 것처럼, 그들의 솟구침과 일어남 또한...주장을 하려는 것인지 분노의 표출인지 우리는 책을 읽는 동안 주목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위 내용과 별개로 책 속에 등장하는 은교와 무재의 대화가 언제 읽어도 참 위로가 된다는 생각이 듭니다. 긴 장마 동안 마음까지 시들지는 말자는 취지에서 둘의 대화를 소개하며 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 나는 쇄골이 반듯한 사람이 좋습니다.
그렇군요.
좋아합니다.
쇄골을요?
은교 씨를요.
……나는 쇄골이 하나도 반듯하지 않은데요.
반듯하지 않아도 좋으니까 좋은 거지요.
그렇게 되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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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재 씨는 반으로 자른 계란을 집어서 내 그릇에 넣어주고 나머지 반쪽을 입에 넣었다. 멀리 떨너진 면옥의 벽에 걸린 거울을 보니 무재 씨의 맞은편에서 나는 얼굴을 매우 붉히며 앉아 있었다. 왜 그렇게 땀을 흘리느냐고 무재 씨가 물었다. 탕이 너무 뜨거워서, 라고 말하며 나는 냅킨으로 땀이 밴 이마를 눌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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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부 먹죠.
와.
좋아요?
네.
좋다니까 좋네요.
나도 좋아요.
이런 대화를 나누면서 도 경계를 넘었다. 」
이상하게 비가 오면 유난히 자주 생각나는 노래들이 있지 않나요? 오래된 노래인데도 비 오는 날이면 플레이리스트에서 꺼내 듣게 되는 노래를 이번 주 추천곡으로 선정했습니다. 긴긴 장마를 다함께 잘 버텨보아요 :D